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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의 다른이야기:인물탐구] 잭슨 폴록: 추상표현주의, 액션페인팅, 미국, 미술사 본문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잭슨 폴록은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 화가로, 액션 페인팅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기법으로 유명다. 그의 작품은 캔버스에 페인트를 뿌리거나 흘리는 방식으로, 색과 선이 형태와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효과를 보여준다.
어린 시절과 교육
잭슨 폴록은 1912년 1월 28일, 미국 와이오밍 주 코디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르로이 폴록과 어머니 스텔라 메이 맥클루어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가족은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의 이민자였고, 아버지는 측량사로 일하면서 가족과 함께 와이오밍, 아리조나, 캘리포니아 등 여러 곳을 이동하며 자라왔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폴록은 아버지와 함께 측량 여행을 다니면서 미국 원주민 문화와 자연에 대해 배웠다. 미국 원주민의 도자기, 토템, 그리고 벽화 등에 영감을 받기도 하였고, 또한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만화책과 잡지를 보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특히 디즈니의 캐릭터들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1928년에 가족과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하면서 수공예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프레드릭 존 드 세인트 브레인 슈반코프스키라는 선생님을 만난다. 슈반코프스키는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신비주의 사회의 회원이기도 했다. 그는 폴록에게 그림과 회화를 가르쳐주고, 유럽의 현대 미술의 흐름을 소개해주었다.
폴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그렇다.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학교의 규칙과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고, 자신의 창의성을 표현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고 있었다. 1930년에 형제 찰스를 따라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서 미술 학생 연맹에 들어가서 토마스 하트 벤튼이라는 미국 화가에게 배움을 받게 되었고 벤튼은 폴록에게 그림의 구성과 리듬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폴록은 벤튼의 작품 주제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의 화풍과 자유로움에는 영향을 받게 된다.
영향을 준 예술가와 운동
폴록은 멕시코의 사회주의 벽화 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디에고 리베라,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등의 작품을 감상했다. 그는 그들의 거대하고 강렬하며 정치적인 작품들에 감명을 받았고, 시케이로스는 폴록에게 에나멜 페인트를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폴록은 나중에 이 기법을 자신의 액션 페인팅에 적용하였다.
그리고 유럽의 현대 미술에도 큰 영감을 받았다. 그는 피카소, 미로, 칸딘스키, 모딜리아니 등의 작품을 열심히 연구했고, 특히 서레알리즘 운동에 매료되었다. 서레알리즘은 무의식과 꿈의 세계를 표현하는 예술 운동이었다. 폴록은 정신분석학자 칼 융의 이론에도 관심을 가졌다. 융은 무의식에는 공통된 상징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고 자신의 무의식에서 나오는 상징들을 그림에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액션 페인팅 기법의 특징과 의미
잭슨 폴록은 1947년부터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캔버스를 바닥에 펼치고, 붓이나 스틱, 터키 베이스터 등을 사용하여 페인트를 캔버스에 뿌리거나 흘리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이를 액션 페인팅이라고 부르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신체적인 움직임과 감정을 표현했다. 캔버스에 페인트를 떨어뜨리는 속도와 강도, 방향과 각도, 색상과 조화 등을 조절하면서, 색과 선이 형태와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효과를 만들었다. 폭록은 캔버스에 페인트를 뿌리는 행위 자체가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액션 페인팅은 폴록의 작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캔버스에 특정한 이미지나 대상을 그리지 않는대신, 캔버스 전체를 채우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이를 올-오버 컴포지션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캔버스의 중심이나 가장자리에 구애받지 않고, 캔버스의 모든 부분이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캔버스에 자신의 손바닥이나 발자국 등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캔버스가 그의 신체와 정신의 연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폴록은 액션 페인팅이라는 독특한 기법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성과와 인생을 표현했다.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페인트를 뿌리고, 자신의 신체를 움직이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색과 선이 형태와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효과로 캔버스 전체를 채우는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특히, 당시 최고의 비평가인 그린버그는 폴록의 작품을 감명받아 그의 주요한 지지자가 된다. 폴록의 작품이 미국 미술의 역사에 큰 혁신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폴록의 작품을 기술이나 구성, 색과 선, 캔버스 전체를 채우는 방식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폴록의 작품이 그림이라고 할 수 없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반박했고, 폴록의 작품이 예술의 가치와 품격을 높였다고 말한다.
폴록과 그린버그는 서로 존경하고, 친하게 지냈다. 그들은 자주 만나서 이야기하고, 의견을 교환하였고 또한 서로의 작품에 대해 비판하고, 조언하고, 격려하고, 도전하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의 예술적 신념과 비전을 공유함으로 미국의 현대 미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개인적인 삶과 문제
잭슨 폴록은 예술가로서 성공했지만, 그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있었다.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에 고통받고 있던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관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한다. 자주 분노와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판에도 민감하고 불안하였다. 특히, 자신의 예술적 신념과 사회적 기대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느끼도 하였다.
1945년에 화가 리 크라스너와 결혼하게 되고 그녀는 폴록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될 수 있도록 서포트한다. 그리고 폴록의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다. 게다가 폴록에게 정신분석 치료를 받도록 권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1950년대 초 폴록은 자신의 창조력이 저하되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스타일과 기법을 시도했지만, 만족하지 못했고 다시 술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리 크라스너와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겨 그녀를 소홀히 하고, 배신하고,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자신의 삶에 절망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잭슨 폴록에 대한 평가와 비판
폴록의 작품은 또한 많은 논란과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폴록의 작품이 그림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폴록의 작품이 단지 페인트를 무작위로 뿌린 것이라고 비난했고, 작품이 기술이나 구성, 주제, 의미 등을 갖지 않는다고 하여 예술의 가치와 품격을 떨어뜨린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 비평가들은 폴록의 작품이 자신의 시대와 사회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폴록의 작품이 미국의 역사와 정치, 문화와 사회적 문제들을 반영하지 않고 자신의 무의식과 감정만을 표현하는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예술이라고 비난하였다.
폴록은 1956년 8월 11일에 술에 취한 채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사고를 당해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폴록은 4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그의 죽음은 미국 미술계에 큰 충격을 준다. 그의 아내인 리 크라스너는 그의 유산을 계속 발전시기 위해 작품을 보존하고, 전시하고, 연구하도록 지지한다.